동인천서 탄생한 ‘쫄면’ 실수 아닌 노력의 결과~홍예문 길… 사라져가는 것들을 찾아서 <2> - 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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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면’ 탄생지가 인천이라는 것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쫄면의 탄생 비화 역시 그렇다.
그런데 그동안 알려진 것과 달리 직원의 실수가 아닌 쫄면은 노력과 연구의 결과다. 쫄면을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진 광신제면의 직원들이 뚝뚝 끊어지는 국수 면발에 ‘탄력’을 주려고 했고, 거듭된 노력 끝에 만든 것이 바로 쫄면이다. 쫄면 탄생 비화에는 ‘실수’가 더 극적이기는 하지만 연구와 노력의 결과가 더 납득할 만하다.
인천시 남구의 면류제조업 1호 등록업체인 삼성식품공업사에서 ‘쫄면’ 이전부터 그와 비슷한 면제품을 차이나타운에 납품했다는 주장도 있다. 호황을 타면서 수타면이 정석이던 당시 차이나타운의 작업방식에 기계면이 도입됐는데, 이 기계면이 맛나당에 제공돼 쫄면이 됐다는 주장이다.
어찌됐든 쫄깃한 면에 양배추와 오이, 당근 등 채소를 얹고 매콤, 달콤, 새콤한 고추장 양념을 더해 비벼 먹는 ‘쫄면’이 동인천에서 탄생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쫄면이 처음 나왔을 당시에는 너무 질겨 ‘고무줄 국수’라고 외면받기도 했고, 구청 직원이 불량식품 단속에 나서기도 했단다.
그랬던 쫄면이 여고생이 즐겨 먹는 음식 1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쫄면의 식감과 맛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한 신포우리만두의 노력이 크다. 1960년 말 시작한 정부의 분식 장려 운동도 쫄면의 전국화를 이끈 배경이기도 하다.
쌀과 보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절, 정부의 분식 장려 운동으로 학교 주변에는 분식집이 호황을 누렸다. 학교 밀집 지역이었던 동인천의, 대한서림에서 홍예문까지 이어진 등·하굣길에도 맛나당을 비롯해 만복당, 풍미당, 명물당 등 분식집은 학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맛나당은 쫄면으로, 풍미당은 국화빵과 우동으로, 명물당은 우동과 찐빵으로, 대동문구는 DJ로 학생들을 맞았다.
그러던 차에 1999년 인현동 호프집 화재사건은 이들 분식집에도 큰 타격을 줬다. 축현초와 인천여중·고의 이전도 영향을 줬다. 갈수록 위축된 상권 영향으로 이들 분식점 중 만복당이 2003년 6월 문을 닫았다. 장사가 안 돼 노래방이나 PC방 등으로 업종 전환을 꾀했으나 그마저도 절대정화구역 안에 가게가 있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인근에 인천고등기술학교가 있어 그랬다. 교육법상 고등학교인 이 학교는 그러나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했거나 성인이었던 터라 상인들이 이 지역의 절대정화구역 해제를 요구했다고 당시 신문 기사는 전하고 있다.
인현동 호프집 화재 사고와 학생 수 감소가 동인천 지역 경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쫄면 원조 맛나당도, 우동이 맛있었던 풍미당도, 꽤 인기 있던 분식집들이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기고 하나둘 영업을 접었다. 지금은 신신분식과 늘봄분식 등이 쫄면 원조거리를 지키고 있다. 그래도 주말이면 가족 나들이객들이 많이 찾는다. 저렴한 가격에 푸짐한 양, 거기에 추억을 먹을 수 있어 그런 듯하다.
쫄면을 둘러싼 풍성한 이야기를 잘 정리해 인천시가 추진하는 누들로드에 활용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