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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자료

[김준의 맛과 섬] [34] 연평도 꽃게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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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의 맛과 섬] [34] 연평도 꽃게잡이

연평도에는 대나루라는 곳이 있다. ‘크다’는 뜻의 ‘대’와 ‘포구’라는 뜻의 ‘나루’를 합친 지명으로 ‘대진동’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연평도에서 가장 너른 곳으로 일찍부터 벼농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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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에는 대나루라는 곳이 있다. ‘크다’는 뜻의 ‘대’와 ‘포구’라는 뜻의 ‘나루’를 합친 지명으로 ‘대진동’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연평도에서 가장 너른 곳으로 일찍부터 벼농사를 짓고 있다. 지금은 섬의 동남쪽에 있는 연평항을 이용해 인천을 오가지만 한 세기 전에는 북쪽에 있는 대나루가 관문이었다. 이곳은 갯골이 섬으로 만입해 바람과 파도를 피할 수 있고, 해주나 옹진반도로 오가기 좋은 곳이다. 임경업이 병자호란을 피해 명나라로 갈 때도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북한 용매도와 수압도 주변에 정박해 있는 배에 꽂힌 깃발도 눈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가을 꽃게 철에 북한의 섬 주변 배 수십 척은 모두 붉은 오성기를 달고 조업을 준비 중이다.

우리 어민들은 연평도 서남쪽 어장에서 꽃게를 잡는다. 하지만 꽃게에게 바다에 그어 놓은 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중국 배에 잡히면 중국산이 되고, 우리 어민들에게 잡히면 국산이 된다. 연평바다 꽃게지만 누구에게 잡히느냐에 따라 꽃게의 운명은 달라진다.

지금은 봄가을에 꽃게를 잡아 생활하지만 1960년대까지는 조기에게 의지했다. 봄철이면 조기잡이 배가 연평도에 가득했다. 조기 파시가 형성되면 연평도 뒷골목은 술집, 여인숙, 다방, 식당 등이 흥청댔다. 당시 주민들은 조기잡이 배를 타거나 나무를 팔고 식수를 제공하며 생활했다. 지금도 조기잡이를 하면서 불렀던 ‘배치기소리’를 흥얼거리는 주민을 만날 수 있다. 그때는 꽃게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물을 훼손하고 떼어내기 힘들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 봄에는 암꽃게 몇 마리 반찬으로 쓸 것 빼고는 버렸다. 고추 모종을 심고 옆에 거름 대신에 꽃게 한 마리 푹 찔러놓았다는 주민도 있다. 꽃게는 쉽게 상하고 보관도 어렵고 소비지가 멀어서 유통은 더욱 힘들었다. 냉동 창고가 보급된 후에야 꽃게가 도심까지 유통될 수 있었다. 조기가 연평 바다에서 사라졌으니 꽃게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꽃게가 금값이다. 가을 꽃게 철이다. 어둠이 걷히는 새벽이면 불을 밝힌 배들이 연평 바다로 꽃게를 찾아 나선다.